1. “식기의 완성은 음식이다” – 미슐랭 셰프들이 주목한 그릇의 조건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기 선택은 단순한 외형의 문제가 아니다. 식기는 요리의 질감, 온도, 향, 그리고 시선을 담아내는 ‘프레젠테이션의 틀’이다. 최근 미슐랭 셰프들 사이에서 한국 옻칠 그릇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늘어난 이유도 이와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파리의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 Le Blanc Silence의 셰프 마르셀 토마(Marcel Thomas)는 “요리의 색을 맑게 받쳐주는 식기”를 찾던 중 한국 전통 옻칠기에 매료되었다고 말한다. 옻칠 특유의 은은한 광택과 깊이 있는 색감은 재료 본연의 빛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배경처럼 조화를 이룬다. 그는 “그릇이 음식보다 튀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 조용히 녹아들면서 집중을 유도한다”며 “플레이팅이 아니라, 공간 전체를 디자인하는 느낌”이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평가는 단순히 감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옻칠 그릇은 스테인리스나 도자기보다 열을 천천히 전달하고 유지하는 특성이 있다. 이는 미세한 온도차에 민감한 요리, 특히 생선이나 온기가 유지되어야 하는 소스류에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 셰프들은 더이상 음식만을 예술로 보지 않는다. 이제는 그 예술을 담는 그릇까지 ‘한 접시의 완성’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2. 옻칠이라는 공예, 그릇이라는 철학
옻칠 공예는 단순한 도장 작업이 아니다. 나무 표면에 수차례 생옻을 얇게 바르고 말리는 과정에서 생기는 깊은 질감은, 대량 생산 공장에서 흉내낼 수 없는 수공의 결이다. 일본의 칠기(漆器)와 달리, 한국의 옻칠기는 매트하면서도 촉촉한 광택이 특징으로, 미니멀한 현대 테이블에도 이질감 없이 어울린다.
프랑스의 유명 디자인 갤러리 ‘Maison Du Lieu’는 최근 ‘조용한 식기展’을 열며 한국 작가 한지윤의 옻칠 그릇을 메인 전시품으로 선정했다. 큐레이터는 “이 그릇은 단순히 음식을 담는 도구가 아니라, 마음을 담는 도구”라며 “손으로 만든 곡선 하나, 표면의 미세한 붓결 하나하나가 식탁 위에서 이야기처럼 펼쳐진다”고 평했다.
셰프들 또한 이러한 스토리텔링에 끌린다. 뉴욕의 비건 미슐랭 레스토랑 ‘Éléments’의 셰프 리카르도는 손님에게 음식을 내기 전, 그릇의 제작 과정을 간략히 설명하며 공예와 요리의 경계를 허문다. 그는 “사람들은 식사를 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하러 온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경험을 구성하는 데 있어 옻칠 그릇은 시각, 촉각, 감정까지 건드리는 중요한 장치가 되고 있다.
3. 환경과 감성을 모두 담다 – 지속가능한 식기의 진화
현대의 고급 레스토랑은 단순히 ‘비싼 재료’를 쓰는 것보다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에 더 큰 가치를 둔다. 이 지점에서 한국 옻칠 그릇은 재조명된다. 옻나무에서 추출한 천연 수액으로 만들어진 이 그릇은 화학 처리를 하지 않고도 방수·항균 성능을 갖추며, 10년 이상 사용할 수 있는 내구성을 자랑한다.
이러한 특성은 음식과 직접 닿는 식기 위생에 민감한 미슐랭 키친 환경에서 큰 매리트로 작용한다. 플라스틱이나 실리콘 소재는 시간이 지날수록 미세한 흠집에서 세균이 번식할 위험이 있으나, 옻칠은 도리어 박테리아 증식을 억제하는 천연 항균 효과가 있다. 실제로 일본과 한국의 연구소에서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옻칠 표면은 대장균과 황색포도상구균의 생존률이 99% 이상 감소하는 결과를 보였다.
또한 옻칠 그릇은 마모되거나 손상된 부분을 '덧칠'하여 복원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는 다 쓴 식기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게 하는’ 개념으로, 제로 웨이스트 철학과도 맞닿는다. 셰프들이 이 그릇을 사랑하는 건 단지 예뻐서가 아니다. 그것은 철학이 담긴 식기이고, 지속가능한 레스토랑 운영을 위한 하나의 전략이다.
4. 전통이 아니라 ‘현대의 언어’로 – 해외 브랜드와 협업의 미래
한국 옻칠 그릇이 단지 전통적인 분위기의 식당에서만 쓰인다는 인식은 과거의 이야기다. 현재는 스칸디나비아풍, 모던 인더스트리얼 스타일, 심지어 미니멀 아트 주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테리어 콘셉트 속에서 어우러지고 있다. 이는 옻칠 기법이 색상, 형태, 광택 등에서 현대적 변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독일 뮌헨의 디자인 스튜디오 ‘STINN’은 최근 한국의 칠기 작가와 협업하여 블랙 무광 옻칠 그릇과 베이지톤 도자기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컬렉션을 선보였다. 미슐랭 셰프와 갤러리 큐레이터,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이 동시에 구매 대기 리스트에 이름을 올릴 만큼 반향이 컸다.
또한 한국의 젊은 작가들 역시 옻칠을 고루한 전통 기술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소재 자체가 현대성을 지녔다’는 인식 아래, 실험적인 라인업을 출시하고 있다. 반투명 컬러 옻칠, 각진 형태의 도형 조합, 스테인리스와 결합한 칠기 하이브리드 등은 모두 해외 셰프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며, 브랜드와의 협업 기회를 확장시키고 있다.
결과적으로, 한국 옻칠 그릇은 전통이 아니라 ‘현재의 언어’로서 미슐랭 셰프들과 소통하고 있다. 조용하고 느리지만, 깊은 울림을 가진 그릇. 그것이 지금, 전 세계의 가장 까다로운 주방에서 선택받고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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